매일 보던 ‘Lorem Ipsum’ 뒤에 숨겨진 100년의 미스터리
웹디자인이나 개발을 하는 사람, 혹은 문서 템플릿을 만져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쳤을 단어들이 있다.
바로 의미 없는 라틴어처럼 보이는 채우기 텍스트, ‘Lorem Ipsum(로렘 입숨)’이다.
1500년대에 만들어졌다고들 많이 믿는 그 구라의 상징
구글링 해보면 “1500년대의 한 익명 인쇄업자가 활자를 무작위로 섞어 만들었다”라는 설명이 정설처럼 퍼져 있었다.
최근 이 상식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밝혀낸 놀라운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 감동과 함께 진짜 기원이 된 키케로의 원문을 공유해 보려고 한다.
1500년대가 아니라 1914년, 그리고 1966년의 진실
영상의 제작자는 기존의 인터넷 정보들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실제 라틴어 학자들과 인쇄 역사학자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일종의 ‘연구 조사’를 진행했다.
그 집요한 노력 덕분에 밝혀진 핵심 사실들은 정말 흥미롭다.
- 기존 상식의 오류: 납 활자를 쓰던 1500년대에는 디자인만을 위한 가짜 텍스트를 미리 조판하는 게 불가능했다. 즉, 1500년대 기원설은 완전히 잘못된 역사였다.
- 진짜 기원은 1914년: 로렘 입숨의 독특한 오타와 문장 배열은 1914년에 발행된 키케로 저서의 특정 번역본 판본(Loeb Classical Library) 페이지 구성과 정확히 일치했다.
- 디지털로 이어진 가교: 1966년, 영국의 레트라셋(Letraset) 사가 타이포그래피 역사학자의 자문을 받아 이 구절을 정교하게 다듬어 디자인 시트로 보급했고, 이것이 80년대 컴퓨터 프로그램(PageMaker)에 탑재되어 지금의 디지털 로렘 입숨이 되었다.
의미를 지우기 위한 정교한 언어학적 설계
영상의 내용 중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은 이 가짜 텍스트가 대충 뭉뚱그려 만든 낙서가 아니라, 라틴어와 영어를 모두 깊게 이해한 인물이 철저한 의도를 가지고 정교하게 가공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 ‘quia(때문에)’ 단어의 제거
키케로의 원문 문장에서 문맥의 의미를 이어주는 핵심 접속사가 바로 ‘왜냐하면/때문에’를 뜻하는 라틴어 ‘quia’였다.
이 단어가 살아있으면 라틴어를 아는 디자이너가 자꾸 문장의 ‘뜻’을 읽게 되므로,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문장의 의미를 완벽히 단절시키기 위해 이 ‘quia’만 정교하게 삭제했다. - 영문 분위기를 내기 위한 알파벳 변형
본래 라틴어에는 J, K, Y, Z 같은 글자가 거의 쓰이지 않고 Q, U, M이 자주 쓰인다.
반면 영어는 Y나 복합 자음이 많이 쓰인다.
로렘 입숨을 만든 사서 제임스 모슬리는 영미권 디자이너들이 보기에 가장 시각적 균형이 잡힌 텍스트 화면을 구성하기 위해, 라틴어 원문의 Q나 M을 일부 깎아내고 ‘Y’나 ‘-ng’, ‘-ands’ 같은 영어식 철자를 의도적으로 끼워 넣었다.
단순한 오타가 아니라, 완벽하게 ‘의미가 없으면서도 영문 서체 레이아웃을 가장 잘 테스트할 수 있는 형태’로 기획된 고도의 디자인 산출물이었던 것이다.
로렘 입숨의 고향: 키케로의 원문과 번역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복사해서 쓰던 그 문장들은 본래 어떤 내용이었을까?
기원전 45년, 키케로가 남긴 《최고 선악론(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제1권 10장 32절의 원문과 그 의미를 소개한다.
[라틴어 원문] “Sed ut perspiciatis unde omnis iste natus error sit voluptatem accusantium doloremque laudantium, totam rem aperiam, eaque ipsa quae ab illo inventore veritatis et quasi architecto beatae vitae dicta sunt explicabo. Nemo enim ipsam voluptatem quia voluptas sit aspernatur aut odit aut fugit, sed quia consequuntur magni dolores eos qui ratione voluptatem sequi nesciunt. Neque porro quisquam est, qui dolorem ipsum quia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 velit, sed quia non numquam eius modi tempora incidunt ut labore et dolore magnam aliquam quaerat voluptatem. Ut enim ad minima veniam, quis nostrum exercitationem ullam corporis suscipit laboriosam, nisi ut aliquid ex ea commodi consequatur? Quis autem vel eum iure reprehenderit qui in ea voluptate velit esse quam nihil molestiae consequatur, vel illum qui dolorem eum fugiat quo voluptas nulla pariatur?”
[한국어 번역] (1914년 H. 래컴의 영어 번역본 기준) “하지만 나는 쾌락을 비난하고 고통을 찬양하는 이 모든 잘못된 생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해야만 한다. 나는 그 체계의 완전한 전말을 밝히고, 진리의 위대한 개척자이자 인간 행복의 설계자가 남긴 실제 가르침을 설명하고자 한다. 쾌락 그 자체가 쾌락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거부하거나 싫어하고 회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쾌락을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이 결국 극심한 고통이라는 결과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고통 그 자체가 고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사랑하거나 추구하고 얻기를 바라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Neque porro quisquam est, qui dolorem ipsum quia dolor sit amet…), 다만 노역과 고통을 통해 어떤 커다란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때때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예를 들자면, 우리 중 그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하는데 고된 육체적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반대로, 아무런 불쾌한 결과도 뒤따르지 않는 쾌락을 즐기기로 선택한 사람이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쾌락도 낳지 못하는 고통을 회피하는 사람을 비난할 권리가 과연 누구에게 있겠나?”
위 원문에서 굵게 표시한 “dolorem ipsum” 부분이 인쇄 조판과 편집의 역사를 거치며 변형되어 오늘날 우리가 아는 ‘Lorem Ipsum’이 되었다.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과 쾌락, 고통을 논하던 깊이 있는 철학적 문장이 현대 디자인의 뼈대를 지탱하는 텍스트가 된 것이다.
지독한 몰입과 연구가 선물한 지식에 감사하며
단순히 “흔한 상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영상의 원작자는 단 하나의 논문도, 전문가도 없던 이 영역을 밝히기 위해 수십 통의 이메일을 보내고, 해외 도서관에서 수십 년 전의 광고지와 카탈로그를 복사해 오며 가설을 증명해 나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역사를 기록했던 수많은 학자들의 헌신, 그리고 이를 세상 밖으로 끌어올려 준 영상 제작자의 지독한 몰입 덕분에 우리가 매일 쉽게 볼 수 있는 텍스트의 진짜 고향을 알게 되었다.
타인의 깊이 있는 탐구와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사실을 정설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귀중한 지식을 정돈해 세상에 공유해 준 제작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직접 그 소름 돋는 과정을 확인해 보기
본 글에 요약하고 옮긴 내용은 이 영상이 가진 매력과 수많은 세부 증거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2,000년 전 키케로의 문장이 어떻게 현대 디자이너들의 화면에 안착했는지, 그 소름 돋는 추적 과정의 전말이 궁금하다면 아래 원작자의 영상을 꼭 직접 시청해 보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과연 나는 매일 마주치는 일상 속 익숙한 것들의 진짜 기원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