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걸〉꞉ 원작의 99%를 베끼고도 망작이 된 이유
DC 코믹스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수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가 실사 영화로 제작됐다.
스크린에 펼쳐진 비주얼과 전반적인 흐름은 원작 코믹스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외형을 99% 똑같이 베꼈음에도 작품의 영혼을 구성하는 단 1%의 핵심 설정들을 거세해 버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할리우드의 흔해 빠진 삼류 클리셰로 채워 넣었다.
그 결과, 영화는 원작의 깊이를 완전히 상실한 얄팍한 활극으로 전락했다.
영화가 잘라낸 원작의 조각은 무엇이며, 대신 채워 넣은 오물은 무엇인지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1. 빼버린 1% - 작품의 품격과 서사를 만들던 고결한 설정들
원작 코믹스가 명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입체적인 인물들의 빌드업과 신화적인 유대감에 있었다.
영화는 이 정교한 디테일들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전부 들어냈다.
① 주체적 성장 서사에서 ‘발암 PC 클리셰’로 전락한 루시
원작의 주인공 루시는 교양 있고 품격 있는 가문에서 자란 소녀다.
비록 세상 물정은 모를지언정 뼛속 깊이 ‘품위’가 흐르는 인물이다.
부친만 살해당했을 뿐 돌아갈 집도 분명히 존재한다.
복수를 위해 떠난 여정 속에서 루시는 마냥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밤 모두가 잠든 사이 홀로 칼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검술을 수련했다.
모험 도중 카라가 초능력을 잃고 위기에 처했을 때, 루시는 갈고닦은 검술로 괴물들에 맞서며 카라의 곁을 지켰다.
루시가 지닌 칼 역시 원수인 크렘이 가져왔던 무기로, 그녀에게는 복수의 대상이자 스스로 쟁취한 성장의 상징이었다.

결전의 순간, 루시는 묶여 있는 무력한 자를 처단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며 크렘의 결박을 풀어준다.
그리고 대등한 조건에서 그동안 쌓아 올린 검술로 크렘을 압도하며, 손가락을 자르고 다리를 베어 넘긴다.
신체적으로 완벽하게 제압당한 상황에서도 크렘은 회개하기는커녕, 루시의 부친이 죽을 때 어떻게 울부짖었는지 조롱하며 끝까지 루시의 마음에 잔인한 상처를 남기려 든다.
루시가 겪는 복수의 마지막 고뇌는 바로 이 비열한 도발 앞에서 완성된다.

반면, 영화 속 루시는 원작의 이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과 주도성을 잃어버렸다.
말로만 “복수해 주세요!”를 외치며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위 ‘발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주체적인 서사를 지우고 겉포장만 그럴싸하게 꾸민 할리우드식 수동적 PC 클리셰를 그대로 부어버렸다.
비슷하게 들어간 카라가 초능력을 잃고 위기에 처한 장면이 원작을 주제를 완전히 거세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넣은 감옥 탈출 씬은 더 입맛이 쓰다. 악당이 고작 저딴 애한테 당한다고?
② 코메트(Comet)의 통편집과 신화적 애착의 상실
영화에서 가장 치명적인 악수는 카라의 소울메이트인 ‘코메트’를 통째로 편집한 것이다.
코메트는 마법의 저주를 받아 말의 형상에 갇힌 고대 켄타우로스다.
카라를 향한 기사도적 충성심과 비극적인 로맨스가 뒤섞인 절대적 헌신을 바치는 존재였다.

최종 결전에서 코메트는 카라를 향해 날아오는 크립토나이트 화살을 몸으로 대신 막아내며 장렬히 희생된다.
죽음의 순간 저주가 풀려 원래의 인간 모습으로 돌아와 카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은 숭고하고 슬픈 클라이맥스였다.
이 처절한 슬픔이 바탕이 되었기에 분노한 카라의 각성과 폭발이 정서적 정당성을 얻는 것인데, 영화는 코메트를 지워버림으로써 후반부 결전의 무게감을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③ ‘메이폴 행성의 비극’과 방관자들을 향한 통찰의 거세
원작 중반부, 크렘 일당이 거쳐 간 ‘메이폴’ 행성의 비극을 다루는 방식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원작은 단순히 빌런 한 명의 악행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잔혹한 학살이 벌어지는 동안 침묵하고 외면했던 주변 외계 종족들의 차가운 이면을 깊이 있게 고발한다.
이는 고향 크립톤이 멸망할 때 우주 전체로부터 방관당했던 카라의 과거 트라우마와도 직접 연결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 우주적 스케일의 구조적 모순이나 방관자들의 심리 묘사를 완전히 쳐냈다.
그저 단순한 ‘선악 구도의 액션 추격전’으로 치환하며 작품이 던지던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증발시켰다.
④ 메타픽션 장치의 붕괴꞉ ‘기록하는 자’로서의 루시
원작은 노년의 루시가 과거를 회상하며 집필한 ‘책’의 형태를 띤 메타픽션 구조다.
독자가 보는 모든 컷과 문장은 루시라는 인물의 주관과 기억을 거쳐 필터링된 결과물이다.
이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가 가진 숭고함’을 뜻한다.
동시에, 자의적인 왜곡도 가능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카메라가 객관적으로 사건을 따라가는 선형적 플롯으로 바꿨다.
덕분에 원작 고유의 문학적 가치를 평범한 관찰자 시점으로 떨어뜨렸다.
2. 채워 넣은 삼류 클리셰 - 어설픈 장르 복제의 향연
원작의 깊이 있는 설정을 덜어낸 자리에 영화가 채워 넣은 것들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성 제품들의 장점 없는 짜깁기였다.
- 〈매드맥스〉의 열화판이 된 악당 설정
원작의 빌런 크렘은 우주를 호령하는 거물이 아니라, 본질이 비열하고 찌질한 ‘우주 해적 잔당’에 불과하다.
칼을 든 어린 소녀에게 사지가 베여 나가면서도, 숨진 부친을 조롱하며 정신승리를 하려는 패배자의 악랄함이 묘사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영화는 상투적으로 악당의 스케일을 키우기 위해 “여성들을 납치해 종족을 번식시키려 한다”는 설정을 덧붙였다.
이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설정을 얄팍하게 차용한 것이며 원작 고유의 악당 해석을 망가뜨렸다. - 〈더 마블스〉식의 정신산만한 워프 액션
원작 코믹스는 행성 간의 이동을 서사시적인 유랑이자 고독한 여정으로 묘사하며 깊은 사색을 유도한다.
반면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자극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공간을 비틀고 행성을 건너뛰는 포탈 워프 연출을 남발한다.
이는 〈더 마블스〉를 연상시키는 산만한 우주 액션 활극의 공식일 뿐, 원작이 가진 스페이스 웨스턴 특유의 황량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게다가 가는 행성들의 풍경이 모두 대동소이해서 싸구려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도 없는 건 덤이다. - 시간 때우기용 소모품으로 전락한 ‘로보(Lobo)’
원작의 서사적 깊이를 채우지 못하고 얄팍하게 끼워 넣은 또 하나의 장치가 바로 ‘로보’ 캐릭터다.
이 캐릭터는 극의 흐름이나 인물의 성장 서사에 하등 기여하는 바가 없다.
그저 화려한 액션 한 번 더 보여주거나, 러닝타임을 어떻게든 때우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원작의 고결한 감정선 대신 자극적인 눈요기용 캐릭터로 분량을 채우려는 게으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심지어 크렘 일당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 납치”를 하는 놈들인데 로보랑 뭘 어쩔라고…
심지어 잭 스나이더의 DCEU에서 이미 아쿠아맨을 연기 했던 배우의 배가 나온 모습은 대체… 휴…
결언꞉ 겉모습만 닮았다고 명작이 되지 않는다
영화 〈수퍼걸〉은 원작의 화려한 컷들과 비주얼을 스크린에 옮겨오는 데는 일부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물의 품격, 상실을 대하는 고결한 태도, 그리고 신화적인 유대감이라는 진짜 알맹이는 모조리 내버렸다.
원작의 존재론적 서사를 대중적인 장르 클리셰의 하위 호환으로 분해해 버린 결과물은 참담하다.
99%의 복제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1%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덧1. 원작 코믹스 엔딩이 보여준 ‘모호함의 가치’에 대하여
많은 독자가 원작 코믹스의 엔딩을 두고 “그래서 크렘을 누가 죽인 거냐”며 혼란스러워하곤 한다.
노년의 루시가 쓴 노란색 텍스트에는 “그의 가슴에 검을 밀어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림을 보면 루시는 늙어버린 크렘의 코를 지팡이로 내려칠 뿐, 그를 살려둔 채 카라와 함께 걸어간다.
작품의 서사 구조와 작가의 연출 의도에 따르면 크렘은 죽지 않았다.
루시가 기록을 왜곡한 이유는 크렘의 잔당들이 자신에게 복수하러 오지 못하게 하려는 현실적인 방책이었다.
이 ‘텍스트와 이미지의 불일치’가 주는 모호함은 원작의 품격을 높이는 장치였다.
복수의 맹목성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죗값을 치르게 한 루시의 고결함, 그리고 역사를 주체적으로 ‘기록’하며 서사를 통제하는 영리함이 그 모호함 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는 이 위대한 모호함마저 견디지 못하고 후반부에 그 분이 직접 처단하는 일차원적인 결말로 바꾸어 버렸다.
이 정도면 마지막 순간까지 장르적 깊이를 얄팍함으로 맞바꾼 꿋꿋함을 장점으로 봐야 하나…
덧2. R.I.P. Comicstorian 벤 포터(Ben Potter)
이번 수퍼걸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해외 코믹스 채널 Comicstorian의 영상을 많이 참고했다.
그래픽 노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던 운영자 벤 포터 님이 안타까운 사고로 영면에 드셨다는 비보를 뒤늦게 알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
고인의 열정이 담긴 아카이브 덕분에 포스팅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팬에게 코믹스의 즐거움을 선물해 준 그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