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글꞉ 생명 게임, 게임, 초현실수, 그리고 콘웨이
이전 글에서 콘웨이의 생명 게임에 대한 오래된 기억들을 언급했었다.
아련한 추억의 글이라 이를 공유할 만한 한 커뮤니티에도 같은 글을 올렸다.
그러자 한 귀인(이라고 쓰고 굇수라 읽는다)께서 댓글을 별도 글로 올려주셨다.
너무 좋은 글인데다, 커뮤니티 글의 특성 상 조금 지나가면 묻혀질 것 같아서 허락을 받고 여기 올린다.
언제라도 원작자 님의 글은 수정될 수 있고, 이 글은 원작자 님께서 삭제를 요청하시면 언제라도 삭제 예정.
https://damoang.net/free/6221059
BLUEnLIVE 님이 생명 게임에 대한 정말 재미있는 글을 써주셔서, 댓글을 달려고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그냥 따로 글로 올려봅니다.
생명 게임은 아마 콘웨이가 처음 만들었을 때는 모눈종이에 연필과 지우개로 진행 상황을 따라가면서 했을 텐데, MIT 해커들이 여기에 빠져서 학교의 컴퓨터 자원을 이런 거 하는데 낭비(?)를 아주 열심히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애호가들이 새로운 패턴들을 찾아내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요. 글라이더 건 등등.
Bill Gosper의 glider gun입니다. 글라이더들을 일정 시간 간격으로 쏩니다.
이후, 생명 게임 내부에서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아니 전자도 논리회로도 전선도 없는데 무슨 컴퓨터?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글라이더를 전자처럼 쓰고, 글라이더의 충돌을 잘 제어해서 and, or, not 등의 논리소자를 만들어내면, 그 다음에는 이걸 잘 조합해서 정말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죠. 기술 용어를 쓰자면, 생명 게임은 튜링 완전성을 갖는다는 것이 알려집니다.
글라이더입니다. 생명 게임의 가장 기본적이고 쓸모있는 패턴이죠. 날아갑니다.
생명 게임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은 별 희한한 패턴들을 그 세계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생명 게임 속에서 구현한 생명 게임, 자기 복제하는 패턴, 컴퓨터, 등등. 단순하고 따분해 보이는 규칙이 알고보니 상상을 넘어서는 복잡성과 흥미로운 패턴을 허용한다는 것은 신기합니다.
콘웨이는 생명 게임 이전에 일류 수학자였죠. 근데 일류 수학자인데, 그가 연구한 것들을 보면 묘하게 보통의 수학자들이 다루는 보다 표준적인 수학적인 대상이 아니라 (물론 그런 쪽 일들도 많이 했고 탁월한 성과들을 냈지만), 훨씬 유희 수학(recreational math)에 가까운 대상에서 출발해서, 그것으로부터 깊은 수학적인 연관성을 끌어내는 종류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자신이 온갖 게임을 잘 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의 제목이 아마 라틴어로 magister ludi일 텐데, magister ludi(유희의 대가)라는 칭호가 딱 어울리는 분이었습니다. 일종의 솔리테어(1인용 게임)인 생명 게임을 만든 것도 그렇고요.
수란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다양한 수들이 있고, 우리는 매일같이 이 수들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것들을 헤아리고 다루는 데에 써먹곤 합니다. 하지만 이 수들이 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다루는 계산 규칙에 모순은 없는 걸까요. 수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들을 보다 단순한 수들로부터 점차적으로 구축해나가는 일을 해왔습니다. 자연수…는 소위 페아노 공리계라는 것으로부터 주어졌다고 가정합니다. 다음, 정수는 자연수로부터 만들고, 유리수는 정수의 비로 정의합니다. (기술적으로는 quotient set 등이 동원됩니다만 여기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실수는? 모든 실수는 유리수들을 둘로 나눕니다. 예를 들어, 2의 양의 제곱근이 있다고 하면, 2의 양의 제곱근보다 더 작은 유리수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유리수들의 두 조각으로 유리수 전체가 나뉘게 됩니다. 데데킨트라는 수학자는 그렇다면 거꾸로, 그러한 유리수의 ‘절단’ 자체를 실수로 정의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이러한 점진적인 구축에 의해, 우리는 자연수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가 실수라고 부르는 대상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상들)이 수학적 세계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점진적인 구축의 다소 지저분한 면은, 어떤 경우 우리는 같은 대상을 여러번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수 42라는 대상은, 처음 페아노 공리계로부터 자연수 42로 만들어지지만, 그 다음 그 위에 정수 42, 그 위에 유리수 42, 그리고 그 위에 실수 42가 있게 되니, 결국 하나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 여러 차례 거듭해서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들이 모두 중구난방이죠. 정수를 만드는 방법, 유리수를, 실수를 만드는 방법이 죄다 다릅니다.
콘웨이는 이러한 전통적인 수 체계의 구축 기법을 기가막히게 단순화하고 일원화한 새로운 수 체계의 구축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공집합에서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새로운 수들이 무한정으로 만들어지는 이 수 체계를 콘웨이 본인은 아마 처음에 그냥 ‘수(number)’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나중에 이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컴퓨터 과학자 도날드 크누스에 의해 ‘초현실수(surreal number)’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정착되게 됩니다. 이 글자 그대로 ’무에서부터 출발하는‘ 수 체계는 놀랍게도 실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로 계속 새로운 수들을 만들어 내어, 집합론에서 순서수라고 불리우는 무한의 순서를 세는 수들, 그리고 이들을 사칙연산으로 결합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또다른 수많은 수들을 포함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수들을 다 포함하는 수 체계를 이 초현실수의 간결하고 우아한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냅니다. 이 안에는 보통의 실수들 뿐만이 아니라 무한대들, 그리고 이들로 나누어서 만들어진 무한소들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들이 다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크누스는 이 초현실수를 가지고 짧은 이야기를 썼었죠. 어느 젊은 남녀가 탄 배가 난파되어 이들이 어떤 무인도에 표류하는데, 그 섬에서 JHVH Conway라는 신이 남긴 초현실수 석판의 규칙들을 탐구해서 초현실수 체계를 스스로 재구성하는 이야기인데, 초현실수에 대한 입문서로 역설적으로 콘웨이의 책보다 더 유명해져버렸습니다.

콘웨이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인용 게임의 승패의 기록과 초현실수를 연결해서, 수의 세계와 게임의 세계를 대응시켜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신기한 일을 해냅니다. 아니, 수면 수이고, 게임이면 게임이지, 어떻게 수가 게임이고 게임이 수가 되는 거죠? 콘웨이 본인이 이 내용에 대해 쓴 책은 보통 ONAG라는 약어로 불리는, On numbers and games라는 책입니다. 나중에, 역시 magister ludi답게, 다른 수학자들과 함께 Winning Ways라는 제목의 4권짜리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각종 게임들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컬러 인쇄된 삽화가 아주 예쁜 책입니다. 이중 일부 게임들은 직접 친구와 함께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심심할 때 해봐도 재미있습니다.

콘웨이는 2020년 코로나 시국에 코로나 때문에 결국 돌아가시죠. 과학과 기술을 주로 주제로 한 약간 너디한 만화로 유명한 XKCD에서는 콘웨이를 추모하는 의미로 생명 게임의 패턴을 animated gif로 만들어서 올렸습니다. XKCD에 흔히 등장하는 막대기 형태의 인물 하나가(콘웨이?) 한 손으로 인사하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패턴입니다. 생명 게임의 규칙에 따라 이 패턴은 부서지면서 땅에 남은 픽셀들은 몇 번의 변모를 거치면서 사그라들고, 단지 글라이더 하나만이 남아서 하염없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유희의 대가 콘웨이의 죽음에 대한 추모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덧. XKCD에서 올린 저 패턴은 실제로 동작하는 패턴임. 다시 한 번 R.I.P.
